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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을 긋는 소녀> 독을 든 마녀와 성에 갇힌 공주, 그렇기때문에 펜을 든 기사
    카테고리 없음 2020. 3. 7.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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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arp Objects, 2018​※스포츠 1러시아가 있슴니다. ​ 8부작 영화로 치면 무려 6~7편의 영화를 보는 시간임에도 타이틀을 보자마자 보아야 하지 sound 든 드라마. 원제는 Sharp Objects인데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이 이야기 제목 번역에 능숙했어요. 길리언 플린이 그녀의 대표작 와인을 찾아서보다 이미 집필한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에게 더 개인적인 작품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연출을 맡은 것은< 와서 1·><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시위 루리)>등을 만든 크에벡 감독,'장 마크 발레'. 최근 여성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은 <빅 리틀 라이즈>를 만든 사람답게 이 드라마에서도 여성의 심리를 깊이 이해한 연출을 보여준다. 여자가 여자 이야기를 늘 잘 만드는 것도, 남자가 여자 이야기를 잘 만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 감독을 보면서 늘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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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가누는 소녀>는 기자 '카밀(애기위 아다소음스)'이 자신의 고향인 '윈도갭'에서 두 소녀가 살해되는 문제가 생기자 취재를 겸해 집에 머물며 시작된다. 돼지 도축이 주요 산업이라는 점에서 소음을 견디지 못하는 이 지역에는 (대부분의 예기가 그렇듯) 매우 난해한 비밀이 숨겨져 있고, 지역 구성원들은 모두 제각각 앓고 있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윈도 갭'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지 궁금해지는데, 다행히 가상의 도시라고 합니다. 드라마 속에서 죽어도 살고 싶지 않은 곳으로 그려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주민들이 지역의 자존심이 빠졌다고 난리였을 테니까~) 이 드라마가 끝까지 숨기고 있는 비밀은 과연 놀라는 자신,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비밀을 미끼처럼 살짝 흘리면서 결미까지 시청자를 이끄는 연출이다. 성인이 된 카밀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는 플래시백 장면을 가끔 짧게 끼워 넣는 방식인데 이것이 상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어릴 적 카밀은 그것에 출연한 소피아 릴리스다. 붉은 털과 주근깨 때문에 '애기위아다소음스'의 비슷한 형태로 불렸고, '그것'의 후속작에 애기위아다소음스의 캐스팅이 언급될 정도였다. 결미<그것 2>에는 '제시카 차 스테인'이 캐스팅됐으나 이 작품에서도 에키우이아다소움스과 인연이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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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이 복잡하게 얽힌 내면을 지닌 인물이라 배우가 누구인지 매우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섬세한 연기의 최고봉인 아듀스는 최적의 캐스팅이다. <녹터널 애니멀스>와 <콘택트>는 거의 거짓 없이 그녀의 표정이 이끄는 영화 아닌가. 그리고 이 작품도 이에 앞서 아듀스의 얼굴 가득, 따라서 훌륭한 가예 드라마다.주인공 카밀은 술을 물처럼 쉬지 않고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다. 그것도 보드카만 마시는데 그걸 매일 한 병씩 마시며 운전하고 취재하고 쓰는데 지장이 없어 깜짝 놀랐다. (정 스토리는 엄청난 주량이었다.) 이때보다 먼저 아듀스가 극중 노출 장면이 많은 sound임에도 불구하고 콘택트 때처럼 현실적인 몸매로 나온 모습은 프로답다고 느꼈다. 술을 식사보다 많이 마시는 사람이 매일 헬스클럽에서 PT를 받고 복근을 장착한 몸으로 나오면 얼마나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 아마도 카밀은 아듀스가 맡아온 인물 중 가장 무겁고 우울한 캐릭터일 테지만 그녀의 새로운 얼굴과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목 sound도 평소 디즈니 공주 같은 하이톤 대신 중저 sound에 허스키한 목 sound를 내려고 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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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빼는 소녀라는 제목 그대로 카밀의 몸은 모두 자해의 흔적으로 다소 덮여 있다. 이 영화의 결과는 2가지 질문을 원동력으로 삼아" 나쁘지는 않다"라는 작품이었다. 소녀들을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카밀은 왜 자해하는가?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로 끝을 맺었고 이 질문은 하나도 나쁘지 않다고 맞장구를 쳤고, 그 답은 시청자들에게 그녀가 자해하지 않았기에 참을 수 없었다고 수긍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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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희생자인 나쁘지 않은 트리는 사람들을 물어뜯을 만큼 야성적인 성격으로 울 사람들이 싫어했다. 2번째 희생자인 앤은 어머니가 걸어 준 분홍색 방에 맞지 않게 거미를 적당히 하는 톰보이이었다. 카밀의 이복동생 엠마(엘리자스카렌)는 집에서는 어머니가 빗어준 머리와 입혀준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고 마스크의 자유분방한 복장으로 비행을 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카밀은 그중에서도 고집이 제일 강했고, 어릴 때부터 친동생 마리온과 달리 엄마 아드라(패트리샤 클락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었다. 소년처럼 짧게 자른 그녀의 머리도 아드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이처럼 <몸을 가르는 소녀>에는 딸을 공주처럼 키우려는 어머니와 그녀의 인형이 되기를 거부하는 딸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소녀들이 엄마의 욕망을 어떻게 흡수하고 거부하는지에 대한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카밀은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릴 적 내내 사랑받지 못하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카밀은 외아이를 받는 여동생을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때문에 여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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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후반에 카밀웅 여동생'나카묘은리'을 죽였다고 의심되는 '죠은・키ー은(테 1러시아의 존 스미스)'와 성관계를 갖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존 킨이 정스토리 살인범으로 기정사실화된 상태에서 그는 한 살 여덟 살짜리 미성년자였고 카밀은 형사 리처드(크리스 메시나)와 사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선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하지만 존이 동생을 잃은 상실감에 전해지고 있다는 것, 외부인인 데다 살인범으로 곡해되고 있기 때문에 마을의 아웃사이더라는 점에서 카밀의 감정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카밀은 그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존 역시 카밀의 자해 흔적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바라보고 읽고 쓰다듬으며 그녀의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카밀은 리처드에게도 보이지 않던 본인의 상처투성이의 몸과 감정을 존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항상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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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이 자기 아내의 실음이 아니라 카밀과 상처를 공유했다. 끊임없는 자해와 자살 시도로 병원에 수용됐을 때 그는 정서에 맞는 룸메이트를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고 카밀조차 그녀를 구하지 못해 결말 룸메이트는 자살할 것이다. 그렇게 카밀의 여동상을 닮았던 룸메이트의 대나무 소리는 카밀의 트라우마를 더욱 강화시킨다.그뿐인가? 심지어는 카밀은 숲 속에서 동네 남자아이들로부터 집단 강간을 당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길리언 플린이 거짓 없이 엄격하다는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매일같이 소녀들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소식이 들려오는 세상은 그보다 더 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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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스토리의 숲 오두막은 강간당한 기억을, 화장실은 변기의 자기 역사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기억을, sound 악은 sound 악을 나쁘지 않았던 룸메이트를, 금발을 한 소녀들은 룸메이트와 여동생을 카밀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래서 카밀은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자해를 해요. 자신감에 찬 기억을 순간의 쾌락과 고통으로 밀어내기 위해 힘겨운 고통을 대신 육체로 옮기기 위해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여동생이 죽은 것은, 강간을 당한 것은, 룸메이트가 자살한 것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다. 보통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의 행복이 아니기 때문에 벌을 주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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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밀의 어머니 아드라는 윈드 갭이라는 촌락의 왕이었다. 돼지 도축회사의 사장이자 경찰서장과 내연관계를 맺고 촌락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집도 당연히 그녀가 권력자다.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화려한 집은 성처럼 지어졌고 그녀는 그 안에서 언제나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임금 행세를 할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선을 긋고 있어서 용납될 수 없는 신발이 들어 갈 수 없다. 놀랍게도 그녀의 둘째 남편 '아란'도 방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이때 내내 그녀의 명령에 복종하는 그는 남편이 아니라 마치 집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내보내는 집사 혹은 DJ에 가까운 것 같다. 그래도 그녀의 통제욕은 멈추지 않고 소녀들을 괴롭히다 끝내 죽여 버린다. 심지어 자기 딸마저도... 그래서 아이를 잃은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녀는 매번 입을 다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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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반에 들어서면 놀랍게도 아드라의 병적인 취향이 자신의 어머니에 기인한다는 목소리가 드러난다. 앨런의 줄거리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좋아했던 아드라의 어머니는 딸을 수시로 숲속에 버려두고 단독 집까지 찾아오게 한 것이었다. 결국 숲 속에서 그녀가 느낀 무시무시한 무력감은 권력에 대한 강한 갈망으로 자란 본인 아드라에게 아이들을 잡아가는 숲 속의 마녀로 만들었다.그래서 아드라는 딸들에게 하는 사인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사인도 엄마에게 학대받았으니 괜찮다고 정당화시킨다. 무엇보다 그의 심리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한번도 받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극중 그녀는 카밀에게 네가 날 구할 줄 알았어. 네가 나를 사랑해 줄거라고 생각했어. 내 엄마가 나를 사랑해 줄 줄 알았어라는 스토리도 되지 않는 스토리를 합니다.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왜 자식 같은 자식에게서 찾으려 하는가? 결국 그녀는 카밀의 스토리너이자 아이일 뿐이야. 껍데기만 어머니 1만, 속에는 어머니에게 사랑 받고 싶다고 울고 있는 아이가 있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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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점에서 미혼이라면 겪거나 나쁘지 않은 경험을 하는 순간의 일, 동창생들이 카밀 앞에서 출산과 육아를 경험했다는 이유로 유세를 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한 인상을 준다. 길리언 플린의 냉소가 가장 짙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들은 부모가 돼야 어른이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어린 시절을 낳고 학대하는, 부모가 돼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부모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드라라는 캐릭터가 부모가 돼야 한다, 모든 여성이 다시는 출산을 경험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한 드라마의 반박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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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드라마에 그냥 초본인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드라를 '뮌하우젠 대리 증후군'이라는 병명으로 설명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남을 간호하고 구원하는 것에서 권력과 쾌락을 느끼기 때문에 1프로파일 남을 다친 병. 남편을 통제하기 때문에 독 버섯을 1프로파일 먹이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팬텀의 스레드>을 떠올리다 보면 지극히 비현실적인 설정은 없다. 그래서 본인은 캐릭터에 특정 병명의 명찰을 다는 것이 별로 좋은 선택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남자 주인공의 사연과 병명을 설명해 주는 후반부 같은 아쉬움이랄까. 불친절함과 미스터리함이 콘셉트였고 매력인 드라마가 막바지에 지나치게 친절해져 매력이 반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다 본인 마지막 마지막을 보고 본인은 왜 드라마가 그렇게 선택을 했는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들러의 병은 진짜 범인으로 반전을 감추기 위한 1종의 함정이었다(무엇보다 어머니가 이 병에 잘 걸린다는 설명은 '모성 신화'를 저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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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이 이야기 <몸을 가누는 소녀>는 병든 부모에게서 병든 아이의 성장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심심해 죽겠어, 그래서 엄마의 사이코 DNA가 만 본인 크기의 괴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죠. 바로 카밀의 이브아우 엠마다. 카밀이 촌락에 왔을 때도 그녀와 아내의 소리를 만난 듯 감쪽같이 연기해 등골을 서항에 몰아넣었던 그녀는 또래의 그녀들을 군림하다 마성에 맞지 않는 소녀들을 살해하고 말았다. 집에서는 착한 딸, 밖에서는 여왕벌인 그녀의 이중생활은 아마 그녀의 정체에 대한 복선이었을 것이다. 엠마가 아드라와 인형의 집을 공유하고 카밀의 집에 와서도 그것을 가지고 온 것은 그녀가 아드라와 같은 부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는 앨런이 왜 살인에 동조했느냐는 대답이기도 하다. 딸아이를 가둘 수 없으니 이 말입니다. ​의 결이 이야기의 집과 청라 쿠로부터 칭크오봉 인기 때문에 그래서 카밀을 불러내기 위한 그녀의 빅 픽쳐이었던 것 1? 그런 본인 엠마가 카밀의 집에 와서도 카밀처럼 자해개취가 있는 아이를 조종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의 포식은 멈추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본인은 어떤 새로운 카밀의 사정보다 엠마의 욕망이 더 신경이 쓰이는 본인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본인을 찾아줘> 때도 읽지 않았던 길리언 플린의 책을 의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소악마를 연상시키는 에마를 놀라운 장악력으로 소화했다'엘리자베스 스컬 렌'는 이 드라마에서 당신 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앞으로 그녀의 얼굴과 이름을 잊어버리고 1은 없을 것 같다. 그녀는 호주 출신으로 타지에서 온 그녀를 에이미 애덤스가 촬영 내내 정이 주는 따뜻한 접대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메리칸 허슬 촬영 때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이 그녀를 왕따시킨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연기한 카밀과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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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자신 있는 마지막 반전은 극적인 전개를 위한 연출일 뿐, 카밀의 치유와 성장이 엠마에 의해 실패했습니다"라고 소견하지 않는다. 그녀는 엄연한 자신의 숙원사업이었던 '마녀(엄마)를 퇴치하고 성 안에 갇힌 공주(여동상) 구출'이라는 퀘스트에 성공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난 그녀가 정스토리가 대단하다고 소견해.​ 엠마는 friend들을 살해할 정도로 두려운 존재이지만, 어쩔 수 없이 10대 소녀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애들러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리고 그녀는 포기하면 편하다며 아드라의 독을 순순히 마시고 그녀의 욕망을 흡수한다. 반면 카밀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소리에도 아드라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어머니의 타인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쉬운 길을 택한 적이 없었다. 언제 자신이 반발하며 투쟁하고 어머니의 욕망을 튕겨내며 자신을 지켜냈다. 설령 자신이 귀여운 딸,미친사람이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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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하우젠 증후군을 설명하는 장면을 보면 이 드라마는 결국 인간을 두 부류로 바라보는 듯하다. 괜찮아의 상처를 남에게 치유해주는 사람과, 괜찮아 당신이 짊어질 사람. 아들러와 엠마가 전자라면 카밀은 분명히 후자다. 그래서 그녀는 남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고, 괜찮아 속에서 그 분노와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자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는 수많은 죽음으로 인한 고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녀의 상처투성이 몸은 하나종의 영광스러운 상처가 됐고 등장인물 중 가장 병들어 보였던 그녀는 사실 가장 건강하고 정상적인 인물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무엇보다 그녀의 담에는 든든한 용병의 두 남자,'리처드'과 편집장의 '캐리'가 있다.(리처드를 연기한 크리스 메시나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에이미 애덤스와 부부를 연기했고 호흡이 상당히 양호해 에이미 애덤스가 그를 추천해 이 드라마에 캐스팅됐을 것이다.) 이때 아이초에게 카밀의 상처를 깨닫고 그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마을로 보낸 커리는 카밀의 어릴 적 잃은 그녀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흑인이며, 마을에서 유연히 카밀과 감정이 통하는 동창도, 성에서 탈출한 카밀과 엠마가 사귀는 프렌드도 흑인이다. 애초에 카밀의 방에 붙은 버락 오바마=HOPE라는 포스터가 의미심장한 지점이다. 결국 이 드라마는 백인과 기독교, 결혼과 가족이라는 삶의 틀이 정해진 윈드갭의 비극을 통해 이 틀을 깨고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섞인 세상을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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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빼는 소녀는 두 명의 소녀가 살해된 데서 비롯됐음에도 철저히 여성이 주도하는 서사라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 소녀들을 살해한 존재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약자로 꼽히는 10대 소녀가 진정한 포식자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나는 길리언 플린의 여성 캐릭터가 관객의 사랑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녀들은 온화하게 웃고 말하는 대신, 극중 대사처럼 ' 남을 세치 혀에 계속 1 된다'여성 특유의 잔인함을 껌 쵸은콧 과시한다. 이들 여성의 복잡함, 그 중에서도 10대 소녀들의 두려움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와인 좀 찾아줘>를 남자 관객이 특별히 손짓을 한 것도 아마 주인공이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여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들이야말로 여성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 카밀을 제외한 모든 여성 캐릭터가 그렇듯, 어머니에게, 남자에게, 세상에 맞추기 위해 탁월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가면을 기리고 나의 광기를 감정적으로 펼치는, 이 이해할 수 없는 듯하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욕망을 품은 길리언 플린의 만년들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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